어둠 속의 희망
🔖 우리의 현재 위치와 과거 위치를 견주어봄으로써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 하나 있다면, 그건 상상 불가능이 일상적 조건이라는 사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거의 절대 한눈에 들어오는 직선도로가 아니며, 우리의 직관은 물론이고 맹점마저 받아들임으로서 대비해야 하는, 뜻밖의 일과 선물과 고통이 도사린 구절양장의 길이라는 사실이다. ... <총과 돈을 가졌으며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암암리에 결심한 듯한 저들의 권력이 얼핏 보기에 압도적이라 해서, 정의를 위한 투쟁을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 압도적으로 보이는 저 권력이 (앨라배마와 남아프리카의 흑인이건,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베트남의 농민이건, 폴란드, 헝가리, 소련의 노동자와 지식이긴이건 간에) 사람들의 도덕적 열의, 결단, 단합, 조직, 희생, 재치, 기발함, 끈기 앞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거듭 또 거듭 입증됐다.
🔖 인과론은 역사가 전진한다고 가정하지만, 역사는 군대가 아니다. 그건 서둘러 옆걸음 치는 게이고, 돌을 마모시키는 부드러운 물방울이며, 수세기에 걸친 긴장 관계를 깨뜨리는 지진이다. 때로 한 사람이 어떤 운동의 영감이 되거나 한 사람의 말이 몇십년 뒤 그리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열정적인 몇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때로 그들이 거대한 운동을 촉발하여 몇백만이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때로 그 몇백만을 똑같은 분노나 똑같은 이상이 뒤흔들면, 변화는 마치 날씨가 바뀌듯 우리를 덮친다. 이런 모든 변화의 공통점은 상상에서, 희망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희망하는 건 도박과도 같다. 그건 미래에, 당신의 열망에, 열린 마음과 불확실성이 음울함과 안정보다 나을 가능성에 거는 것이다. 희망하는 건 위험하지만, 두려움의 반대다. 산다는 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기에.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지은 멋들어진 우화 하나를 소개하자. 13세기가 막바지로 다가갈 무렵, 신이 우리에 갇힌 표범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이 감옥에 살다 죽게 되는 건, 내가 아는 어떤 인간이 널 몇 번 본 뒤 잊지 않고, 네 형상과 상징을 우주의 얼개 안에 정해진 자리가 있는 한편의 시 속에 자리잡도록 하기 위해서다. 너는 갇혀 고통을 겪지만, 너로 인해 그 시가 단어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그 시의 제목으니 ‘신곡’이고 표범을 보게 되는 인간은 단테다. 어쩌면 슬레이메노프가 그 모든 시를 쓴 건 어느날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서서 시가 아니라 선언문을 낭독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룬다티 로이가 자신을 국제적 작가의 반열에 쏘아올린 매혹적인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을 쓴 것도 그가 댐과 기업과 부패와 지역성의 파괴를 반대하고 나섰을 때 사람들이 주목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시도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지구가 유린당하는 데 반대했는지도 모른다. 몇해 전 친구 하나가 편지를 보내 운동보다는 글쓰기의 서정적 목표에 초점을 맞추라고 권하기에, 다음과 같이 내가 답했던 적이 있다. “가려진 것,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 시장에 내놓을 수 없는 것, 경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지역적인 것, 시적인 것, 상궤에서 벗어난 것 등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기업 주도 지구화에 저항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그래서 그런 것을, 당장 실천하고 예찬하고 연구할 필요도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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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죽기 전 한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저 비길 데 없고 독특한 독일계 유대인 에세이스트이자 문예이론가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오늘 무사히 발표하는 글 한줄 한줄은–우리가 그 글을 내맡기는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 암흑의 힘에서 쟁취한 승리다.”